동우회 봄철 문화해설 (정동길)
외환은행동우회에서 회원들과 정동길 문화해설 행사를 하였다.
동우회원이시며 서울 문화해설사인 이기석선배께서 수고를 해 주셨다.
정동(貞洞)이라는 이름은, 조선 태조 이성계의 둘째 부인 신덕왕후(神德王后)의 능묘인 정릉(貞陵)이
이곳에 있었던 것에서 유래한다.
황해도 신류산 아래 용연이라는 연못이 있는데, 근처 마을에 살던 강씨가 연못에서 빨래를 하고 있었다.
근처에서 사냥하던 이성계가 연못을 발견하고 황급히 물을 마시려 할때 강씨가 손수 물을 바가지에 떠주며
버들잎을 불며 천천히 마시라고 버들잎 몇 개를 띄웠다. 이에 크게 감복한 이성계는 본처 한씨와의 사이에
이미 장성한 아들들(이방원 등)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스물한 살이나 어린 강씨를 1392년 조선 최초의
왕비로 들였다. 하지만 신덕왕후는 국 4년 만인 1396년에 젊은 나이로 눈을 감게 된다.
태조 이성계는 도성안에 능묘를 둘수 없다는 신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경복궁에서 보이는 황화방(皇華坊)
높은 곳에 정릉을 조성하고 신덕왕후를 위해 정릉 동쪽, 옛 경기여고 자리에 흥천사(興天寺)를 세웠다.
본처 한씨의 소생인 이방원은 신덕왕후 강씨를 싫어했는데, 1408년 태상왕인 이성계가 세상을 떠나자,
태종은 신덕왕후를 후궁으로 강등하고, 1409년에는 정릉을 도성 밖 양주 사을한록(沙乙閑麓)(성북구 정릉동)
으로 이장시켰다. 태종은 묘의 봉분을 깎아 무덤의 흔적조차 남기지 말라고 명했고, 정릉의 정자각을 헐어내
태평관 북루를 새로 짓는 데 사용하게 하였다. 게다가 홍수로 청계천 광통교가 유실되자, 정릉의 병풍석을
포함한 석물을 광통교 석축을 복원하는 데 사용하여 외견상 백성이 신덕왕후를 밟고 지나가는 것과 다름없다.
정릉이 옮겨간 후, 연산군 10년(1504)에 일어난 화재와, 중종 5년(1510)에 유생들이 지른 방화로, 절의 건물은
모두 불타고, 종만 남았다. 흥천사 종은 한동안 동대문 문루에 걸려 새벽과 저녁에 시각을 알리는 용도로
사용되다가, 광화문 문루에 매달리게 되다, 이왕가박물관(일제가 지은 창경궁내 박물관) 창경궁 명정전 뒤편
회랑에 진열되었다 1938년 덕수궁으로 이전하였고 1972년 모든 소장품이 경복궁 안에 있던 국립박물관으로
이사를 갔느느데 그 와중에도 흥천사 종은 덕수궁에 그대로 남았다.
현재 흥천사 종은 덕수궁 광명문(옛 함년전 정문) 안에 보루각 자격루(국보 제229호) 옆에 있다.
시청 별관 1청사 13층 휴게실에서 덕수궁과 정동길이 훤히 보인다
덕수궁德壽宮(원래 이름은 慶運宮경운궁)의 원래 정문인 인화문仁化門 자리
(현재의 덕수궁의 정전正殿인 중화전中和殿, 중화문中和門과 일직선상에 인화문이 있었다)
대한문의 원래 자리.
육영공원 育英公院
우리나라 최초의 관립 근대학교(1886년 9월 23일 개교)로서정부고관자제만을 수용하는 신분적 제한과 어학 교육을 주로 하는 교육 내용의 한계, 외국인 교수들에 의해교육되는 특수학교인 점과 재정난으로 1894년에 폐교되었다. 설립목적 “현금 각국 교제에 있어 어학(語學)이 가장 긴급한 일이다. 따로 공원(公院)을 설립하고 연소 총민한 자를 선택해 이습(肄習)”.
대한제국에서 설립한 육영공원이 폐교되고 독일영사관, 독립신문사가 있다가 1928년 경성재판소, 정부수립후
대법원 청사로 사용되었다.
1995년 대법원이 서초구로 이전하면서 서울시립미술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바로옆 건물이 가정법원이 있었던 곳으로 ㄴㅁ녀가 덕수궁 돌담길을 걸으면 사라이 이루어진다는 얘기와
함께 부부가 덕수궁 돌담길을 걸으면 이혼을 한다는 속설도 있는데 이는 이혼하러 가정법원을 가려면
덕수궁 돌담길을 지나야 하기 떄문이라는 우스개 소리도 있다.
앞면은 그대로 인데 옆을 보면 건물 앞면만 남겨두고 뒷쪽으로는 현대식 건물로 개측을 하였다.
우리나라 최초의 벽돌교사인 배재학당 동관
정동공원은 우리나라 최초의 카톨릭수녀원 터이다.
1892년 러시아공사관이 건축되었다. 현재는 종탑만 남아있다.
구세군 중앙회관. 1928년 건축된 원형 그대로 보존되고 있다.
경기여고터에는 수백년된 회화나무만 덩그러니 남아있다. 덕수궁 선원전터이다.
덕수초등학교 자리는 KBS 전신인 경성방송국이 있던 자리로 1927년 12월16일 첫 방송을 내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