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뱃상
어릴적 설날부터 정월대보름 전날인 정월 열 나흗날까지는 세배를 다녔더랬다.
우리집도 할아버지, 할머니께서 계시다 보니 설즈음엔 세배오시는 손님들이 끊이지 않았다.
가까운 친척들은 설날 큰할아버지 댁에 차례 지낼 때 우리 할아버지,할머니께 세배를 드린 터라
우리집으로 오는 세배꾼은 가까이 사는 먼 일가친척, 고모부, 당고모부이신 사위들, 그리고
동네 남자 어른들이 대부분이었다.
세배상의 유래는 문안비라고 여자는 세배하러 다니지 못하던 시대에 여자하인을 대신 보내어
설날 문안인사를 드렸고 그 하인을 문안비라고 했다고 한다.
문안을 드리러 온 하인에게 약간의 음식을 차려줬는데 그 상을 세배상이라 하였고 약간의 돈을 주기도 했는데
세뱃돈의 유래라고 한다.
하지만 그 문화가 변하여 우리 집 세뱃상이 된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정월에 세배 드리러 오시는
남자 어른들께 차려 내던 간단한 밥상을 세배 상이라고 했다. 대부분 식사 때를 피해서 오시는 분들이라
차리지 말라고 하시는 데도 우리할머니와 엄마는 꼭 차리셨다.
식사 때가 아니라서인지 새뱃상의 떡국그릇은 유난히 작았던 기억이 난다.
작은 소반에 떡국 한 그릇, 녹두지짐이 한 접시, 나박김치, 인절미 몇 개 놓은 접시에 다식 약과 한 두 개
그게 전부였던 것 같다. 물린 세배상에 남은 떡 접시는 늘 우리들 차지였다.
그릇이 비어서 나오면 엄마는 표정이 흐믓하셨고 우리는 섭섭했었다.
금년 2월에 작년부터 다니고 있는 이미란발효학교에서 김치에 관한 책을 내기 위한 작업의 일환으로
각자의 프로필 사진을 찍는데 주제가 자신들의 추억을 떠올리는 밥상 차리기로 주어졌다.
시기적으로도 음력 정월이라 나는 엄마가 차려내시던 새뱃상을 차려 보려고 했다.
한복에 광목행주치마를 두르시고 짧은 시간에 후다닥 차려 내셨던 엄마의 새뱃상을 차리려고 하니
밥상의 상차림은 떠오르지 않고 상을 드신 엄마의 모습만 머릿속에 가득했다.
그리고 본적 없는 엄마의 새색시 적 모습이 함께 그려졌다.
기억 속에 엄마가 새뱃상을 차리던 모습은 초등학교 고학년이나 중학시절이니까 엄마 나이가 40대였을 때인데
나는 한복에 행주치마를 두른 엄마의 모습을 떠올릴 때면 항상 상상 속의 새색시 적 엄마가 떠오른다.
어느 해인가 우리 집 네 자매가 큰 당숙께 새배를 드리러 갔는데 한복 입은 모습이 예쁘다고 딸들이
모두 엄마를 닮았다고 당숙모를 비롯 친척들이 칭찬을 해주시는데 그때 듣고 계시던 당숙부의 말씀은
나 뿐 아니라 우리 자매들 기억에 강하게 남아 있어 가끔씩 회자된다.
"예쁘긴, 그년들 넷 인물 다 합쳐도 저희 엄마 인물 하나만 못해" 라고 한 말씀이다.
어렸을 적 몇 번인가 당숙모께 들은 얘기가 있다. 엄마가 갓 시집 오신 새색시 때 빨간 치마에 초록저고리를
입고 행주치마를 두르고 일하는 모습을 보고 혹시 여우가 사람으로 둔갑을 하고 우리 집안을 해하려고 온 게
아닐까 생각이 들 정도로 우리 엄마가 예쁘셨다고 했다.
밥상을 차리려고 옛날의 기억을 떠올려 보려는데, 보지도 못한 엄마의 새색시 적 모습이 불현듯 떠올랐다.
작은 딸아이 시집 보낼 때 혼수로 보낸다고 구입하여 깊숙이 넣어 두었던 소반 공예 대가의 해주소반을 꺼냈다.
양지머리를 고아낸 국물에 떡국을 끊이고 고명으로 오방 색을 맞춰 올렸다.
무우나물과 고사리나물 한 접시, 배추 김치 한 보시기, 파김치와 도라지김치 한 접시, 동태 전 한 접시
그리고 떡국 그릇 옆에 내가 담근 7년 묵은 진간장 한 종지 조촐하지만 깔끔하고 맛깔스러워 보이는 밥상이었다.
한복에 흰색 행주치마를 두르고 밥상을 들고 있는 사진을 보며 실없이 웃음이 나왔다.
새색시 적 엄마의 모습을 떠올리면 준비한 새뱃상을 60대 중반의 내가 들고 웃는 모습에 그냥 자꾸 웃음이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