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쓰기

매년 첫눈 내리는 날 정오에 만나요.

단계와 넓은여울 2023. 12. 27. 07:49

매년 첫눈 내리는 날 정오에 만나기로 해요

 

                                                                                            박선배 psb1026@hanmail.net

 

   첫눈 오는 날이면 가끔 생각나는 추억거리가 하나 있다.

연애 경험이 없는 나에겐 매우 소중한 로맨틱한 추억이랄 수 있다.

 

   대학 시절 군대 가기 전에 친하게 지내던 6명의 친구가 있었다. 여학생 4명은 여자만 갈 수 있는 가정대를, 고교 1년 선배와 나는 남자들만 있는 상대를 다녔다. 학교외 클럽(요즘 말로 동아리)에서 알게 되었는데, 군대 가기 전까지 한 1년 넘게 참 친하게 어울려 다녔다. 오후에 수업이 없는 날엔 점심을 각자 해결하고 가정대 근처에 있는 청송대에서 만나 수다 좀 떨다가 자연스레 장소를 옮기게 되는 순서였다.

 

   70년대 초반, 허구 한날 데모로 지샜던 시절이라, 아마 절반도 학교를 다니지 못했던 것 같다. 한 학기에 두달도 못 다니고 휴교를 밥 먹듯이 했으니 말이다. 캠퍼스 내에도 출입을 제한하는 시기도 많았으니 자연히 학교 밖에서의 만남이 자주 있을 수 밖에 없었다. 2학년을 마치면 군 입대를 해야 한다는 대한민국 남자들의 당연한 코스 덕분에 공부는 뒷전일 수 밖에 없었다. 대학생이 되었다 하면 캠퍼스라이프라는게 허구헌날 미팅으로 점철되는 시절이었지만, 경제적으로 여유롭지 못했던 까닭에 1학년 때 2번의 미팅 이외엔 복학 후에도 미팅을 가져 본 적이 없었다. 학교축제에 여자친구랑 함께 가 본 적은 물론 없었고, 다만 클럽행사로 2학년때 참석은 하였으나, 행사가 끝나고 메인 축제엔 집으로 가야 하는 처량한 신세였었다. 그러다보니 딱히 캠퍼스라이프라고 추억할 만한게 없는 나에겐 가정대 여학생들이 소중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개인적으로 단둘이 만난 적은 거의 ㅇ벗었다.(없었다를 빨리 치면 꼭 이렇게 나온다) 정말 자주 만났던 사이였지만 분명 연인 관계는 아니었고, 그 당시 대부분 학생들이 그랬듯이 우리는 항상 서로간에 존칭을 사용했다.

 

   우리가 만났던 장소는 학교에서 모이면 동교동 언덕 오른편에 위치했던 바로크란 카페에서, 시내로 나오면 영락교회 앞 애플이란 카페에서 수다를 떨었다. 주류는 주로 파라다이스나 마주앙을 마셨고, 가끔 맥주를 곁들이기도 했다. 비용은 대부분 경제과 형님과 여학생 1(부산출신인데 동교동 주택에서 남동생과 거주)이 부담을 했기 때문에 술과 안주의 결정권은 주로 선배형님과 동교동 여학생이었다. 늘 빈털터리였던 나는 공짜로 밥과 술을 얻어먹는 재미로 아마도 따라 다녔다고 봐야 한다. 대신에 늘 분위기메이커 역할은 톡톡히 해 주었다고 자부는 한다. 경제과 형님은 워낙 착하고 딸 부자집 장손이라 나보다 더 애교가 넘쳤고, 나는 유머가 풍부하다는 얘기들을 많이 들었다.

가끔은 동교동 집 따뜻한 아랫목에서 큰 담요 밑으로 발만 집어 넣고, 둥그렇게 앉아 사가져 간 술과 안주로(담배는 안 피웠다), 배를 채우며, 생각은 별로 나질 않지만, 무슨 할 얘기들이 그다지도 많았는지 밤새우기도 몇 번씩 한 듯하다. 데모로 지새웠던 시절에 조금은 창피한 핑계지만, 사실 우리는 의식이 있었던 그런 대학생들은 아니었다.

 

그렇게 놀고 먹느라 세월 가는 줄 모르던 군대 가기 전 74년 겨울 크리스마스 이브 날(첫눈은 아니었으나 눈이 왔다) 이었다. 그날도 동교동 집에서 5명이 밤을 지새고, 다음날 조조 상영시간 중앙극장에서 '엘비라 '란 영화를 거의 졸면서 보았다. 모짜르트의 감미로운 음악을 자장가삼아...(모짜르트 작곡도 나중에 알았다) 우린 당연한 코스인 듯 애플 카페로 자리를 옮겼고, '우리 내년부터 매년 첫눈 오는 날 12시에 이곳 애플에서 만나기로 해요' 누군가의 제안에 모두가 전적으로 찬성을 했다.

 

   그리곤 나는 세 달후 753월 논산 훈련소로 입대를 했다. 물론 32개월의 군 생활과 함께 나는 첫눈 오는 날의 약속도 잊어버렸다. 이성간에 친구가 가능한지, 불가능한지에 대한 논의도 많이 했던 거 같다. 친구가 가능하다는 편에 서 있던 나는 당연히 잊어야 되는 줄 알았던 것 같다. 그 여학생들은 복학하면 나와는 전혀 상관없는 사람들 일거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직장을 가지고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을 때 사귀는 여자가 진정한 이성 친구가 될 수 있다고 생각, 아니 믿었던 것 같다. 그러려면 복학 후 공부도 해야 하고, 취직도 해야 하는데 무슨 여자친구를 생각할 겨를이 있겠는가 하고 말이다.나의 뇌리에서 까맣게 잊어버린 친구들이었다.

 

   세월이 흘러 30여 년이 2005년 가을에 가정대학 동교동 여학생으로부터 연락이 왔었다. 늘 우리에게 경제적인 부담을 덜어 주었던 동교동 살던 친구였다. 큰애가 가입한 싸이월드가 원인 제공자였고, 그분이 유학중인 큰딸의 싸이월드에 우연히 연결이 되었다. '아빠, 성함이 ㅇㅇㅇ? 혹시 ㅇㅇ대 ㅇㅇ학과 나오지 않았니?' 유학간 딸들 생활의 일면을 보고, 애들과의 대화를 위해 나두 싸이회원이 되었는데, 우연히 사람찾기에서 내 이름을 넣어 보고, 즐겨찾기에 있는 큰애 싸이를 통해 큰애 방명록에 글을 남긴 것 이었다고 나중에 들었다.

그렇게 내게 연락이 닿아 약속을 잡게 되었다. 강남역 뒷골목 샤브집에서 처음 만나러 가던 날 괜스레 가슴이 두근두근했던 건 애인은 아니었지만 30년전의 여자친구들을 만나는 상황이니 어쩔 수 없는 긴장과 설렘이었으리라. 할머니들(?)을 만나게 된 것이다. 젊은 시절 자주 만났던 친구들을 만나는 날, 사귀었던 여자친구들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가슴이 두근두근거리는 건 어쩔 수가 없었나 보다. 첫눈에 금방 알아볼 수가 있었다. 반가운 악수를 하고 앉으니 의외로 30년전 분위기를 찾는 데는 오래 걸리지가 않았다. 한 분은 칠레, 두 분은 여기에 살고 있다고 했다. 칠레로 이민간 분이 마침 일시 귀국하여 자리를 함께 했다. 1년에 한번쯤은 국내에 머문다고 했다. 고교 형은 졸업 후 진즉부터 연락이 두절된 상태였다. 네 사람이 오붓하게 저녁을 함께 했다.

사람은 곱게 늙어야 한다고들 하는데 정말 곱게들 늙었다. 얘기는 당연히 기가 센 할머니들이 주도하고 있었다. 아직까지도 직업들을 가지고 있으니 실제로 대단한 할머니들이 되어 있었다. 이미 나는 30년으로 돌아가 할머니들 앞에 귀염둥이(?) 노릇을 하고 있었다. 정말 즐겁고, 유쾌하고 나에게도 이런 놀라운 경험이 주어지는구나 하는 시간가는 줄 모르는 시간이었다.

 

   12시가 다 되어 현관문을 들어서자 말자, 집사람이 여자 만나고 온 것 같다고 해서 정말 등골이 오싹하게 낌짝 놀랐다. 바로 이실직고하고 말았다. ㅎㅎㅎ. 늘 그렇게 살아왔지만, 그날 이후 나는 집사람에게 무슨 일이든 어느 한번도 둘러댄 적이 없다. 여자의 직감이 어떠한지를 몸으로 직접 실감하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첫눈 내리는 날 만나자고 했던 약속(?)은 모두가 기억은 하고 있었지만, 칠레로 이민 간 친구가 일시 귀국할 때마다 만나기로 했다. 미국 이민간 친구분이 들어와 네 명이 또 한차례 저녁을 같이 했다. 곤지암 근처에 사는 동교동 살던 친구가 서울 사는 딸애 집에 올 때는 셋이 만나기도 했다. 그 후 한 분은 집사람과도 만난 적이 있게 되었다. '당신 얼굴이 아주 좋아요. 이렇게 늦게까지 할 얘기가 많았던 모양이지요' 집에 있던 큰딸 하는 말, '아빠도 오랜만에 여자친구들 만났다는데 할 얘기가 왜 없겠어요?' 그래 할 얘기가 너무 많아 수시로 만나기로 했다.(속으로)

 

   코로나떄문이기도 하지만 한동안 또 잊고 있었는데 거의 5~6년 만에 가정대 여학생에게 연락이 왔다. 칠레에 사는 친구가 일시귀국했다고 했다. 양평 근처 식당에서 점심을 하면서 오랜만의 회포를 풀었다. 동교동 친구가 심근경색으로 2년여 무의식 상태로 있다가 작년에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았다고 했다. 나에겐 일부러 연락하지 않았다고도 했다.

 

   평생 잊지 못할 추억을 만들어 준 소중한 친구들이다. 집사람이 장 담그기 행사하는 기간에 괴산집 방문을 환영한다고 했다엊그제 왔던 눈은 첫눈이 아니다정말 눈이 올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