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3월3일(일) 11시 오금동성당 교중미사
복음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6,39-45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비유를 들어 제자들에게 39 이르셨다.
“눈먼 이가 눈먼 이를 인도할 수야 없지 않으냐?
둘 다 구덩이에 빠지지 않겠느냐?
40 제자는 스승보다 높지 않다. 그러나 누구든지 다 배우고 나면 스승처럼 될 것이다.
41 너는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42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보지 못하면서, 어떻게 형제에게
‘아우야! 가만,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내 주겠다.’ 하고 말할 수 있느냐?
위선자야,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그래야 네가 형제의 눈에 있는 티를 뚜렷이 보고 빼낼 수 있을 것이다.
43 좋은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지 않는다.
또 나쁜 나무는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다.
44 나무는 모두 그 열매를 보면 안다.
가시나무에서 무화과를 따지 못하고 가시덤불에서 포도를 거두어들이지 못한다.
45 선한 사람은 마음의 선한 곳간에서 선한 것을 내놓고,
악한 자는 악한 곳간에서 악한 것을 내놓는다.
마음에서 넘치는 것을 입으로 말하는 법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 박성칠 미카엘 주임신부 강론 >>
산 넘어 조붓한 오솔길에/ 봄이 찾아온다네
들 넘어 고향 논밭에도 온다네
아지랑이 속삭이네 봄이 찾아온다고
어차피 찾아오실 고운 손님이기에
곱게 단장하고 웃으며 반기려네
하얀 새 옷 입고 분홍 신 갈아 신고 (박인희, 봄이 오는 길)
3월의 첫 번째 주일입니다.
3월에는 여기저기에서 봄소식이 들려오겠죠.
봄바람은 따뜻해서 얼어붙은 땅을 부드럽게 풀어줍니다.
우리네 차가운 마음도 부드럽게 녹여줄 수 있습니다.
새싹을 기대하고 꽃 피고 나비 나는 파란 세상을 꿈 꿀 수 있습니다.
봄바람은 고목에도 꽃이 필 수 있다는 희망을 갖게 해 줍니다.
봄바람과 대비되는 것은 가을 서리입니다.
서리는 어떤 기상 현상보다도 농작물에 큰 피해를 준다고 합니다.
봄에 내리는 서리는 차밭을 망가뜨린다고 하죠.
그러면 그해는 우전(雨前) 차 맛을 보지 못하고 넘겨야 합니다.
가을 수확 전에 서리가 내리면 과일 농사도 물 건너갑니다.
가을 채소도 서리가 내리면 잎이 시들어버려 수확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서리는 그렇게 매섭고, 차갑고, 강하고 독한 것입니다.
그래서 생긴 말이 있습니다.
“여자가 한(恨)을 품으면 오뉴월에도 서리가 내린다.”
오뉴월에 서리가 내렸다가는 그 해 농사는 완전히 망가지고 말 것입니다.
여자에게 한을 품게 하면 농작물 죽어 나가듯 그렇게 작살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남자들이여, 조심하고 또 조심할 일입니다.
‘가을 서리’를 한자로 쓰면 추상(秋霜)입니다.
“추상같다”는 말이 있습니다.
사전을 찾아보면 “호령 따위가 위엄이 있고 서슬이 푸르다”고 풀이했습니다.
엄숙함과 냉철함을 빗댄 말이기도 합니다.
봄바람과 가을 서리를 한자로 함께 쓰면 “춘풍추상(春風秋霜)”입니다.
소귀 신영복 선생이 이 글을 좋아해서 즐겨 쓰셨다고 합니다.
춘풍추상은 채근담의“대인춘풍 지기추상(待人春風 持己秋霜)”에서 나온 말입니다.
“남에게는 봄바람처럼 관대하고 자기를 지키기는 추상같이 엄격해야 한다”는 뜻이죠.
우리들은 자기 자신에게는 관대하지만 남에게는 그렇지 못한 편입니다.
남의 떡이 더 커 보이듯 남의 허물이 더 커 보입니다.
그래서 남을 쉽게 판단하고 비판합니다.
그러는 자기는 잘못 하나 없다고 합니다.
그런 사람을 논어에서는 소인이라 하였습니다(子曰, 君子求諸己, 小人求諸人).
"군자는 자기 자신에게서 잘못을 찾고, 소인은 남에게서 잘못을 찾는다."
오늘 복음의 말씀도 같은 맥락입니다.
“너는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위선자야,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그래야 네가 형제의 눈에 있는 티를 뚜렷이 보고 빼낼 수 있을
것이다.”
들보는 대들보 할 때의 들보입니다.
그렇게 들보처럼 큰 허물이 나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내가 티끌 같이 작은 남의 허물을 따지고 비판한다는 것이죠.
똥 묻은 개가 재 묻은 개를 나무라는 격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의 허물은 들보처럼 크게 보라고 하십니다.
다른 사람의 잘못과 허물은 티처럼 작게 보라고 하십니다.
사랑이란 삶에 대한 관대한 자세를 취하는 일입니다.
그렇게 사랑 가득한 마음으로 남을 대하라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과의 올바른 관계는 자기 자신에 대한 깨달음과 더불어 시작합니다.
나의 큰 허물을 깨달을 때, 상대방의 허물은 더 이상 보이지 않습니다.
“누가 죄 없는 사람이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요한복음 8장).
요한복음에서 간음한 여자의 죄를 묻는 사람들에게 하신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이 말씀에 돌을 던지려던 사람들은 자기의 모습을 들여다보기 시작합니다.
그러다가 하나씩 둘씩 자리를 떴다 하였습니다.
이렇게 자기 자신을 살펴보고, 자기의 부족한 모습을 깨닫는 것은 마음공부의 시작입니다.
그래서 불교 수행에서 말하는 <8정도(正道)>의 첫 번째 단계가 정견(正見)입니다.
정견은‘올바로 본다’,‘올바로 깨닫는다’는 말입니다.
스스로를 제대로 보지 못하면 더 큰 죄를 짓게 될 것이고, 고통은 더 깊어져 갈 것입니다.
봄바람이 불고 있습니다.
올해 봄바람을 느낄 때는 꼭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남의 허물에는 봄바람처럼 따뜻하게 대해야 하겠구나”(待人春風).
그럴 때 우리네 마음에도 진짜 봄바람이 불어 올 것입니다.
오늘의 묵상
이처럼 말은 사람의 인격을 드러내 주는데, 하느님께서도 마찬가지이십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당신이 어떤 분이신지 드러내십니다.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죄가 바로 죽음을 가져다 준 독침이며, 율법은 죄가 죄로 드러나게 만드는 구실을 한다고 강조합니다. 율법 앞에서 우리 모두는 죄인, 곧 죽을 운명을 지닌 존재임이 드러나는데, 하느님의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음을 이기심으로써 우리 모두가 죄를 용서받아 구원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해 주십니다.
비록, 썩는 몸, 죽는 몸을 지니고 있는 우리이지만, 그리스도 덕분에 썩지 않는 것을 입고, 죽지 않는 것을 입어 죄와 죽음에서 승리할 수 있게 되었고, 주님의 일을 충실히 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느님의 계획이었습니다.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눈 속에 있는 들보는 보지 못하면서,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만을 지적하는 위선자들을 나무라십니다. 자신도 그리스도 덕분에 구원받았으면서, 형제를 용서하지 못하고, 비난하는 위선을 버려야 한다는 가르침입니다.
사실, 위선자들의 입에서는 위선의 말이 나올 뿐입니다. 결코 좋은 열매가 열리지 않습니다. 마음에서 넘치는 것을 입으로 말하기 마련인데, 입으로 형제들을 비난하는 이는 악한 마음, 곧 자신의 들보를 보지 못하는 위선자들입니다.
선한 사람은 마음의 선한 곳간에서 선한 것, 곧 선한 말을 내어 놓습니다. 그런 사람은 좋은 열매를 맺게 될 것입니다. (염철호 요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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