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아침 출근길, 지하철에서 20~30분의 꿀맛 같은 선잠은 나의 하루를 상쾌하게 해주는 보약이었다.
은퇴한 지 10년이 지난 지금도 지하철을 타면 그때의 아련한 향수를 그리며 눈을 감아 보지만 잠은 오지 않는다.
갑작스러운 고함 소리가 단잠을 깨웠다. 잠깐 잠이 들었었나 보다. 가끔 이러한 불상사(?)가 있는 지하철 내 풍경도
무료한 출근 시간의 재밋거리(?)이기도 하다. 물론 나하곤 관계없는 사건이 일어난다는 전제로 하고.(참 이기적인 놈이다.ㅎㅎㅎ) 출근길이었을 때는 일단 지금 어느 정거장까지 왔느냐부터 확인하는 게 순서였다. 4~5 정거장 이상 더 잘 수 있는 행운이 뒤따라 주면 좋고, 2~3 정거장 이내로 남았으면 좀 아쉬움을 남기는 그런 하루가 되는 셈이다.
"그래, 내 나이 일흔다섯이야, 어쩔 건데. 구십이면 다야!!”
“나도 여기 앉을 자격 있어! 왜 이래. 니가 뭔데 일어나라 말라야!!'
”아니, 젊은 게 앉아 있다니, 머리만 희면 다 늙었어?“
상대 노인네의 말소리는 나에게까지는 거의 들리질 않을 만큼 작다. 목소리 큰 놈이 장떙인 세상, 일방적인 언쟁인 듯하다. 머리 흰 노인네의 말소리가 거의 들리질 않으나 대강의 내용은, 구십된 노인께서 경로석에 앉아 있는 목소리 큰 일흔다섯 사람에게 젊은 게 앉아 있다고 일어나라고 한 것이 다툼의 발단인 모양이다. 사람을 보고 일어나라고 할 일이지, 사람을 잘못 고른 것이다. 일흔다섯이고 아흔이고 간에, 무슨 급한 용무가 있어 하필이면 출근 시간대에 지하철을 타는가 말인가?
앞으론 경로석에 앉을 때, 나이 표를 명찰처럼 달고 있어야 할지도 모르겠고, 경로석을 더 늘려야 하는 시절이 조만간 올 것도 같다. 결국, 젊은 세대에게 짐만 되는 노인층이 늘어만 가는 우리나라는 어찌해야 하나?
'죽으면 늙어야 해.'(단계생각)
요즘 지하철 탈 때면 빈자리 찾는 일이 가장 중요한 과제가 되었다. 요추협착으로 다리에 통증이 있다 보니 빈 좌석 여부가 하루의 기분을 좌우하기도 한다. 노약자석의 변천사는 경로석 → 경로 우대석 → 노약자.장애자 지정석 → 노약자석. 5공 시절 경로석이, 6공 시절 경로 우대석으로, 문민정부 들어 노약자석으로 바뀌었다. 경로(老人은 70세 이상) 인식이 강하다 보니 노약자석으로 바뀌었는데도 노인석으로 인식되고 있다. 노약자석이 비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일반석에 앉아 계시는 노인분들도 많다. 경로 우대석이 비어 있으면 노인들은 경로 우대석부터 채우면 얼마나 좋을까? 누가 봐도 경로 우대석에 앉을 만하다고 인정되는 분들은 그쪽이 비어 있으면 우대석으로 가셨으면 좋겠다. 어찌 보면 그들도 자기보다 더 노인네가 올까 봐, 여유 있을 때 일반석에 자리를 잡는 것이다.
노인은 일반석에 앉아도 상관없으나, 젊은이들은 노약자석이 비어 있어도 앉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실제로 빈 노약자석 앞에도 많은 사람이 서 있다. 이 무슨 해괴한 일인가? 노약자석은 그림에 그려진 4부류의 사람들 외에는 자리가 비어도 앉지 말아야 하는 걸까? 그림 그려진 대로 해석하면 노인, 임산부, 유아를 안고 계신 분, 아픈 사람이 앉을 수 있다. 그러나 이들 중 아픈 사람은 겉으로 얼른 구별하기가 쉽지 않다. 다리가 아프고 몸이 불편해도 나이가 젊으니 노약자석에 앉기가 쉽지가 않다는 얘기다. 혹여 노인분들에게 크게 망신을 당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노약자석이 노인석, 노인지정석이 되어 버렸다.
피곤하고 몸이 다소 불편한 젊은이를 괜스레 짜증 나고 화나게 하는 일이다. 젊은이가 노약자석에 앉아 있으면 어딘가 불편하여 피치 못하게 앉았다고 인정해 주면 안 될까? 노약자석은 강요하는 자리가 아니라, 자신의 양심과 배려의 마음으로 사람 간 약속의 자리이지 않겠는가. 그러한 사회가 언제나 올 수 있으려나.
그래서 나는 아예 그쪽으로 갈 생각을 하지도 않고 7명이 앉을 수 있는 곳에서 기다린다. 그런데 나도 이미 일흔을 넘겼고 요즘 다리가 아프니 참 고민이 많아진다. 백발인 집사람은 아예 노약자석에 앉는다. 젊은 사람들이 앉을 수 있는 자리를 우리가 양보해 주어야 한다는 얘기다. 나는 아직도 검은 머리털이 훨씬 많으니 괜히 쭈뼛거려진다. 노약자석은 비어 있는데 일반석엔 서 있는 사람들이 많으면 과연 노인들한테도 좋은 모습으로 보일까? 노약자석이 노인과 젊은 세대의 거대한 장벽을 만들어 놓은 것 같아 안타깝다.
옛날에는 노인이 앞에 서면 자리를 양보하는 일이 많았다. 아니, 당연했다. 물론 일부 자는 척하는 젊은이들도 있었지만, 주위의 눈총으로 오래 버티기가 어려웠다. 그러나 요즘은 일반석엔 앞에 노인이 서 계셔도 자리를 양보하는 사람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일반석은 우리들의 영역이니깐, 노인들은 노약자석 앞에서 자기네들끼리 경쟁을 하라는 것이다. 당연하고 지당하다. 지하철 안에서조차 노인과 젊은이들 사이에 커다란 장벽이 존재하게 되었다. 노인들이 젊은이들을 일하기 싫어하고 버릇없고 시간과 장소를 가리지 않고 애정행각 하는 애들로 보고 있듯이, 젊은이들은 나이 많은 어른들 보기를 내 자리, 내 밥그릇 뺏는 노인으로 간주하고 있지 않을까 겁도 난다.
우리나라는 획일적인 것들이 너무 많다. 인성교육 및 각자의 양심에 의해서 판단할 개인적인 문제조차도 국가가 개입하여 관리하려고 한다. 예의, 겸손과 양보와 배려가 법으로 정하고 강요해서 될 사안인가? 일상적인 일에서조차도 모든 것들을 획일적인 것으로 만들어 버리길 좋아한다. 그래야 생산적이고, 효율적이며, 관리가 용이해 질 뿐 아니라 속이 편해 진다고 생각한다. 판단할 능력을 원천 봉쇄하고 스스로 판단할 기회를 박탈해 버리는 것이다. 군대식 사고방식, 일제 잔재라고 하면 너무 나간 생각일까. TV CF에서조차도 노약자석이 비어 있어도 앉지 않는 학생들을 칭찬하고, 미화하고 있다. 나는 반대다. 학교 생할에 피곤한 학생이, 직장인이 비록 노약자석이라도 빈자리에 잠시 앉아서 쉬어 가는 게 나쁜 일인가 말이다. 가정교육과 학교 교육에 의해 백년대계로 해결되어야 할 문제를 획일적으로 정해 놓고 따르지 않으면 나쁜 편으로 매도하고, 구호와 홍보로 해결하려는 위정자들이 가장 큰 문제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교육받고 자란 미래세대가 창의적인 사고를 할 수 없는 것은 자명한 일일 것이다.
노약자석을 없애야 한다. 노약자들이 버스를, 지하철을 타면 젊은이들이 앞다퉈서 자리를 양보해 주던 옛날이 그립다. 우리의 미래세대들을 믿어보자. 노인들을 믿어보자. 우리나라를 믿자. 그래야 미래가 있지 않겠는가.
2000년 박카스회사의 TV광고 지하철편 "우리 자리가 아니잖아."
그당시 사회적인 큰 호응과 화제가 되었던 이 TV광고 덕분에 박카스는 매출이 급신장했다고 한다.
박선배 psb1026@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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