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없이 부끄러운 내 자신.
박선배 psb1026@hanmail.net
일흔이 넘으면서 지하철을 타면 은근슬쩍 노약석으로 가는 편이 되었다. 집사람으로부터 일반석은 젊은이들에게 양보하라는 지시가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시청역 근처 동우회 사무실에서 시간을 보내다가 5시쯤 집으로 들어갈 때 2호선 지하철안은 퇴근이 시작되어 꽤 복잡하나, 직장인들이 많이 타는 노선이라 노약자석이 거의 비어있는 경우가 많다. 왕십리역에서 5호선으로 환승을 하면 노약자석뿐만 아니라 지하철은 상당히 북적이는 시간대가 된다. 군자역에서 내리는 사람들이 많긴 하나, 곧 내릴 사람 앞에 서는 건 순전히 그날의 운수소관에 맡기게 된다. 다행히 장안평역에서 앞사람이 내려주어 편한 귀갓길이 되었다. 무심코 앞자리를 보노라니 덩치가 조금 되어 보이는 쩍벌남이 눈에 거슬린다. 7명이 앉아 있고 쩍벌남 양옆으로 중년 여인과 아가씨가 매우 부담스럽고 불편하게 앉아 있었다.
십수 년 전 지하철 출퇴근했을 때의 고약했던 기억이 불현듯 되살아난다. 그날은 군자역에서 내가 서 있는 앞자리 세 사람이 뭉텅이로 내리는 바람에 양옆으로 넉넉하게 자리를 잡았다. 잠시 책을 보고 있는데 광나루역에서 깍두기 머리를 한 덩치 큰 젊은이가 내 몸이 한쪽으로 거의 밀리도록 옆자리에 쿵하고 앉았다. 그리곤 갑자기 내 두 다리가 붙으면서 한쪽으로 쏠리는 듯했다. 못마땅했지만 만약의 사태를 몰라서 은근슬쩍 살그머니 옆을 살짝 보니 심상치 않은 얼굴에 체격도 당당하였다. 가랑이를 쫘악 벌리고 앉는 바람에 내 자리가 아주 옹색하게 되었다. 그래도 옆에 다른 사람이 또 앉아야 하기 때문에 어떻게든 밀리지 않으려고 소신껏 그 덩치가 눈치채지 못하도록 버티고 있었다.
‘옆으로 좀 가 주시죠.’ 우렁찬 목소리에.
‘옆에도 사람이 앉아야…’ 엉거주춤 모기만 한 나의 목소리.
가랑이를 더 벌린다. 밀리면 안 된다는 생각으로 나도 버틴다.
‘옆자리 비었잖아요.’ 다소 신경질적인 목소리.
‘아니, 다른 사람이 또 앉아야…’ 기어들어 가는 나의 목소리.
군자역에서 사람들이 많이 내려 서 있는 사람이 별로 없는 지하철 안에 사람들의 시선이 나한테 몰리는 듯하다. 얼굴이 화끈거린다.
“옆에도 사람이 앉아야 하니까 자기 자리만큼은 지키고 앉읍시다.”
단지 생각뿐 입 밖으로 나오지 못하는 내면으로만 우렁찬 나의 목소리.
갑자기 어지럽다. 어떻게 대처해야 하나? 수많은 생각이 뇌리를 스친다. 애시당초 그 녀석을 쳐다볼 엄두는 내지도 않았다. 결국, 나는 천호역에서 내리고 말았다. 방이역이면 다섯 정거장을 더 가야 하는데, 당연히 내가 내려야 할 역인 듯이 당당하게 말이다.
나 자신에게 화가 난다. 속이 부글부글 끓는다. 초라해진다. 온갖 상념이 상일동행, 마천행 지하철 지나가듯이 지나간다. 나는 왜 당당하게 말을 하지 못했는가? 눈물이 나오려고 한다. 두 번째 마천행 전철이 또 지나간다. 왜 아직도 안 들어오냐는 집사람 전화다. 이젠 웃음이 나온다. 그 녀석의 물건은 도대체 얼마나 크길래 저렇게 가랑이를 쫘악 벌리고 앉았을까.
눈을 뜨면서 자연히 앞자리 쩍벌남 가랑이 사이로 눈이 갔다. 짜식, 별것도 아닌 듯하다. 요즘 내가 잠도 제대로 못 잘 정도로 가장 혐오하고 없어졌으면 좋겠다고 기도하는 그 쩍벌남이 떠오르니 벌떡 일어나 귀싸대기라도 한 대 때려 주고 싶은 충동이 났으나 참았다. ㅎㅎㅎ. 오늘은 다행히 방이역에서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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