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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이야기

아버지를 보내 드릴려면

by 단계와 넓은여울 2010. 11. 8.

나는 TV 연속극이 재미있다. 재미있는 정도가 아니라 음미하면서 즐기고 있다.

핑계를 대자면 부모님하고 평생을 함께 살다보니 TV 연속극이 자연스럽게 일상생활의

한부분이 되어 버린 점도 무시할 수는 없다.

하지만 나의 뇌속에 영화보다는 연속극이란 장르을 훨씬 선호하는 세포가 있는게 분명하다.

옹호를 하자면 그속에서 어쩌면 인생을 배우고 있는줄도 모르니깐.

 

어제 종영을 한 "생은 아름다워'란 연속극이 있다.

연속극에 대한 얘기가 아니라 막내손녀딸 초롱(남규리)과 남친 동건(이켠)의 대사때문이다.

초롱이가 " 할아버지 장례를 치룬 후 일주일도 채 되지 못했는데 너무 빨리 일상으로 돌아가

버리는 가족들이 너무 야속해 ",  " 나는 부모님이 돌아가시면 도저히 견딜수 없을 같은데 말이지."

하며 가족들에 대해서 불만섞인 푸념을 얘기하고. 

동건의 대답  " 우리집도 마찬가지였어. 산소에서 돌아 오면서부터 떠들고 웃고 그랬으니깐.", 

" 우리는 아직 젊어서 할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이 많이 남아 있지만 어른들은 너무 오래동안

함께 살아서 죽음에 대해서 이미 준비를 하고 있는터라 그럴거야.",

" 우리도 나이가 들어가면 아마 마찬가지가 될거야. 하지만 그리운 마음은 다 똑 같을거야."

 

아버님이 돌아가신지가 그래 100일이 되었다. 

숲해설전문가 과정이 출석체크을 가장 중요시 한다는걸 아셨는지 결석하지 말라고 7월말

방학기간중에 돌아가셨다. 생전에 당신과 주변 모든것에 완벽주의에 가까우신 분이였으니

능히 그리하셨을 것으로 믿고 있다.

지금 나는 아버지의 빈자리가 허전하고 있는걸까?  벌써 아버지란 존재를 잊어 버린걸까?

아니, 나도 그랬다. 바로 일상으로 복귀해 버렸다. 그리고 우리 가족도 그러고 있다.

 

나는 아직 2군데 서랍에 들어 있는 아버지의 유품을 정리하지 않고 있다. 

유품이라고 빛바랜 사진 몇장과 서예도구와 써 놓으신 작품(?) 몇점이겠지만...

아버지가 정말 생각나고, 보고 싶고, 그리워 울고 싶을때 펑펑 울면서 서랍을 열어 보려 한다.

그래야  내 마음에서 아버지를 보내 드릴 수 있을 것 같기 때문이다.

아직은 아버지를 보내드릴 마음의 준비가 덜 되었나 보다. 

100일째. 오늘은 삼우제지낸후 내 블로그에 올린 글로 아버지 생각을 대신하기로 하자.

 

<< 집으로 돌아간 사람은 없었다고 합니다.>>  http://blog.joinsmsn.com/psb1026/11731300

지난 28일 저녁 7시20분 아버지께서 결국 집으로 돌아오시지를 못하시고
당신께서 원하시던 머언 하늘나라로 떠나셨습니다.

가시는 순간까지 가족들 고생시키지 않으시려고 무척이나 애를 쓰신 아버지, 감사합니다. 
 
아버지께선 평소에 당신 壽를 아셨는지 望百(91)을 넘기지 못할 것이라 하셨는데
卒壽(90)에 하느님께로 가셨습니다.
 
당시의 부모님들이 대부분 그러했듯이 아버지도 의식주 해결과
댓가없는 아들농사에 온 힘을 다 바쳐 고생만 하셨던 분이었습니다.

넉넉치 못한 집안사정으로 중학교를 다 마치시질 못하고 일본으로 밀항하여

배우신 목수일이 평생의 직업이 되었습니다.

결혼초기엔 돈도 많이 벌었다는데 여순사건과 6.25전쟁으로 인해 연이은 화재로

빈털터리가 되었고, 5.16 나던 해 아버지께서 서울행을 하시게 된 것은

먹고 살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 겁니다.

저는 다음 해3학년때 아현동 산 7번지 달동네에서 서울아해가 되었습니다.

 

그리곤 학창시절, 제가 군대 제대할 때까지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별로 없습니다.

새벽에 나갔다, 밤 늦게 들어 오시는 아버지와 마주할 기회가 거의 없었기 때문일겁니다.

사실 저는 아버지와 진지한 대화를 나누어 본 기억이 거의 없습니다.

저와 아버지는 참 많은 면에서 달랐습니다.

히 저와는 전혀 달리 머리는 정말 영리하신 분 이었습니다.

제가 아버지의 총명함을 알게 된 것도 은행 입행한 다음부터 입니다.

자의든 타의든 그만큼 아버지와 저는 거리가 먼 관계였습니다.

 

부모님이 학교에 오신것은 고등학교 졸업식때가 유일했습니다. 

중학교 졸업식땐 누나만 왔드랬습니다. 

그래서 저에겐 중학교 졸업식 사진이 없습니다.

그렇다고 부모님을 원망해 본 적은 진정코 없습니다.

여태껏 부모님 모시고 잘 살아 왔습니다. 

 

아버지께서는 환갑 가까이 되어서 잠실에 내아파트 마련의 꿈을 이루시더니

중노동에 가까운 직업 성격상 실질적인 은퇴상태가 되어 버린 것 입니다.

이제는 제가 아버지를 알 수 있는 시간이 많아 지긴 했지만,

직장 다닌다고 맨날 밤 늦게 들어오니 제 쪽에서 시간이 없어져 버렸습니다.

아버지와 57년간 함께 살아오면서 집안일에 관한한 제 의지대로 살아본 적이 거의 없습니다.

이제 좀 제 마음대로 살아보려 했더니 ...

그게 그리도 보기 싫으셨던 모양입니다.

한해 정도는 아들이 어떻게 지 마음대로 사는지도 보고 가셔도 될텐데 말입니다.

 

喜壽까지 큰 걱정거리없으시던 아버지께서 만성 신부전증으로 매년 입.퇴원을

반복하시면서도 큰 고생은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위장이 워낙 튼튼해서 식성이 아주 좋으셨거든요.

연세가 있으셔서 그런지 작년말 어머니의 고관절 수술이후 아버지의 체력이 급격히 떨어지고

식욕도 감소하더니 한달전부터는 하루 20시간이상 거의 혼수 상태가 되었드랬습니다. 

결국 요양원에 모신지 여드레만에 하느님께로 가셨습니다.

 

'이곳에서도 집으로 돌아간 사람은 있는게냐?" 요양원에서의 마지막 말씀이셨습니다.

"아니오, 아버지!! 없다고 합니다." 결국 저는 이 말씀을 드리지 못했습니다.

아마도 저희 아버지께서는 법 없어도 사시는 분이시니 천국에 계실 겁니다.

 

"아버지, 마지막이자 처음으로 부탁 하나 합시다."

"어머니 보고 싶다고 얼른 부르시면 절대 안됩니다."

 

이승에서 못 다하신 쉼 천국에서 마음껏 누리시길 기도합니다.

부디 편히 쉬소서.

 

 고 둘째 아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