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수필쓰기

정명순 수필 작가로 등단 (신인상)

by 단계와 넓은여울 2024. 3. 31.

2024년 3월 30일(토) 

 

장떡

 

양평 이미란 발효학교에서 일반과정 6개월을 마치고 1년 과정의 마스터클래스 수업 첫날 커리큘럼에 장떡 만들기가 있어서 큰 기대 없이 참여했다. 기대가 적었던 이유는 중학시절까지 먹어 봤던 장떡이 가끔 생각나고 그 맛이 궁금하여 인터넷에 장떡을 치고 음식점을 찾아 가면 내 어린 시절의 그 장떡이 아닌 밀가루즙에 고추장을 풀고 부추, 애호박, 들깻잎 등을 썰어 넣고 넓게 부진 고추장 부침개였기 때문이다. 우리 가족이 외에 할머니 식의 장떡을 아는 분은 현재 LA에 사시는 80대 고객 분이였다. 해주가 고향이신 사장님께서는 초등학교 시절 부친께서 우리 고향 장단 등기소장을 하여서 몇 년간 장단읍에 사신 적이 있다고 하셨다. 은행에서 직원과 고객으로 만났지만 고향에 대한 동질감이 있어서인지 각별한 사이가 되었고 민통선 안에 있는 내 친정집도 두 번이나 방문하셨다. 고객분의 장단에서의 추억 중 친구들이 반찬으로 싸와 맛 보았던 장떡 맛이 가끔 생각나고 드셔보고 싶다고 하셔서 그때도 여러 음식점을 찾아 나섰지만 예외 없이 고추장 부침만 맛보고 나왔다는 것이다.

   발효학교의 이미란 선생님은 연배도 나보다 아래고 고향도 남쪽이시라 더더욱 고추장부침을 생각하고 갔는데, 결국 그날 우리 집과 같은 방식의 장 떡을 만났다. 그날 선생님과 나는 모두 놀랐다. 나는 당연하고 이미란선생님은 수많은 사람들과 수업을 하면서 장떡을 알고 먹어본 추억이 있는 사람을 처음 만났기 때문이었다

   늦가을에 심어 놓은 마늘의 싹이 제법 큰 오월에 그 풋 마늘과 부추 찹쌀가루와 장가르기 할때 남겨두었던 간장 독에 있는 메주덩이를 함께 반죽한다. 둥글면서도 두툼한 함박스테이크 모양의 떡을 만들어서 솥에 찐 다음 채반 위에서 며칠 말려서 저장해두고 그때그때 기름 두른 팬이나 석쇠에 놓고 앞뒤 뒤집어 가면 구워 먹는 쫀득하면서 짭잘한 반찬인 것이다.

   학교의 재료에는 곱게 다진 쇠고기가 메주 분량 만큼 들어갔다. 기억 속의 우리 집 장떡에는 고기가 들어가지 않는다. 할머니와 아버지께서 육식을 못하셔서 우리 집만 고기를 안넣은건지 아니면 우리고향 장단의 장떡은 고기를 넣지 않는 지 궁금했다. 할머니도 어머니도 안계시니 알 수가 없다. 장떡에 대한 추억이 있는 나는 수업 끝나고 특별히 장떡 두 개를 선물로 가지고 와서 채반 위에 얹어 두고 바로 사진을 여동생들에게 보냈다. 가끔 우리끼리 장떡이 먹고 싶을 때가 있는데 할 줄 아는 사람은 이제는 없다. 엄마 생전에 배워둘걸 하며 안타까워 했다.

   두 동생 모두 모양만 보고도 환호를 보내왔다. 막내 여동생은 두 개 구워 먹는 날 본인이 꼭 끼어야 한다고 했다 5일 정도 지난날, 우리 부부랑 막내 여동생이랑 장떡을 먹기로 했는데  동생이 하루이틀 미루자고 해서 "너 빼고 둘이 먹을래 어차피 장떡도 두 개 뿐인데" 했더니 동생이 강하게 우겨서 미루었다. 동생의 말인즉 "장떡에 대한 추억이 가득한 나랑 먹어야지 아무런 추억도 없는 형부랑 무슨 맛이야?" 그날 정말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할머니 따라서 약초 산행을 가면 반찬으로 꼭 있었다, 해마다 추수를 끝내시면 만주로,백두산으로 금강산으로 때론 남녁땅으로 돌아다니시다가 다음해 파종시기가 되어야 집에 돌아오셨다는 할아버지께서 꼭 싸가지고 가셨던 음식이 장떡이었다고 들었다. 집안의 장을 드실 수 있었기에 배탈이 없이 장기간 여행을 하셨다는 할머니께 들은 옛날 이야기 까지 소환하면서 자매가 장떡 두 개를 놓고 먹는 점심이 너무 풍요로웠다. 내년 장 가르는 날에 세자매가 괴산 집에 모여 꼭 만들어 먹자는 약속도 했다.  오늘이후 우리 자매들의 솔푸드는 장떡으로 한다고 정하기까지 했다.

   그리고 풀리지 않았던 고기가 들어갈까 아닐까에 대한 숙제가 작년 1225일에 세상을 뜨신 아버지의 빈소에서 풀렸다. 왜 그 생각을 못했을까 아직도 정정하신 당고모가 계셨는데 우리 할머니, 엄마가 안 계시니 물어 볼 곳이 없다고만 생각했던 것이다.

   오랜만에 만난 당고모께 장떡을 만들 때 쇠고기 넣냐고 물어 보았다. 당고모는 뜬금 없다는 표정을 지으시며 "고기를 왜 넣어 찹쌀가루에다 장에서 건진 메주, 풋마늘 다진 거 그리고 부추를 많이 썰어 넣어야 된다"고 하셨다. 그래, 앞뒤가 산으로 둘러 쌓인 시골구석에서 쇠고기는 사치였을 것이다. 

 

   얼마전 개성음식 세미나에 참석해서 개성사람들의 솔푸드 장땡이(장떡)이란 주제로 발표된 내용에서 개성사람들은 곱게 댜진 쇠고기를 듬뿍 넣어 만든 음식임을 알았다. 내 짐작이 맞았다 개성과 맞닫은 장단이 음식문화는 같았지만 환경이 고기를 넣을 수 없었음을 내년 봄에는 개성부자들 처럼 쇠고기를 듬뿍 갈아넣고 부추도 많이 썰어 넣는 장떡을 만들어서 당고모댁에도 보내드리고 동생들과 추억의 솔푸드 맛도 함께 나누며 LA 사장님께도 장단에서의 추억을 선물해 드려야겠다.

 

 

세뱃상

나의 고향은 장단군이다

엄밀히 말하면 내 부모님의 고향이다

아버지의 고향은 장단군 진동면 하포리 엄마의 고향은 인접한 장단군 장남면 고랑포리셨다.  장단군은 1945년 남북분단으로 반토막이 나  일부의 면은 북한으로 일부는 남한으로 분단이 되었다. 엄마가 가끔 말씀하셨던 분단의 현실 지금도 생생하다 18살에 해방이 되었다고 장터로 나가서 만세를 불렀는데 얼마지나니까 앞산에는 미군이 뒷산에는 소련군이 주둔을 했었다고 6.25전쟁 후에 남쪽으로 피난을 나오셨고  다행이 우리고향은 남한에 속하긴 하였으나 이마저도 군사분계선의 비무장 지대와 민간인 통제구역이 되었다고

우리집안 뿐이 아니라 비교적 비옥한 지역의 정씨 집성촌에서 평화롭게.살던 우리 친척들은 대부분이 파주에 새로운 터전을 마련하고 가까이에서 살았다. 그런 연유는 단 한가지 통일이 되면 바로 임진강 다리하나만 건너면 고향땅을 밟을 수 있는 지리적으로 가깝다는 그 하나의 이유가 우리를 파주사람으로 만들었다

한국근대사의 남북분단의 소용돌이 중심에서 질곡의 삶을 살아온 때문인지 친척간의 유대관계는 끈끈했던 것 같다 왕래도 자주하고 특히 할아버지, 할머니 두분이 생전에 계시는 우리집은 1년내내 친척들의 방문이 잦았다.    

설날부터 정월대보름 전날인 정월 열 나흗날까지는 서로 세배를 다녔다.  우리집도 할아버지,할머니께서 계시다 보니 이즈음에는 세배오시는 손님들이 끊이지 않았다.  가까운 친척들은 설날 큰할아버지 댁에 차례 지낼 때 우리 할아버지,할머니께 세배를 드린 터라 우리집으로 오는 세배꾼은 가까이 사는 먼 일가친척, 고모부, 당고모부이신 사위들,그리고 고향에서 한동네 살았던 남자 어른들이 대부분이었다.

할머니와 엄마는 세뱃상을 차려 내시느라 늘 분주한 시기였다.

세배상의 유래는 문안비라고 여자는 세배하러 다니지 못하던 시대에 여자하인을 대신 보내어 설날 문안인사를 드렸고 그 하인을 문안비라고 했다고 한다.  문안을 드리러 온 하인에게 약간의 음식을 차려줬는데 그 상을 세뱃상이라 하였고 약간의 돈을 주기도 했는데 세뱃돈의 유래하고도 한다.

하지만 그 문화가 변하여 우리 집 세뱃상이 된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정월에 세배 드리러 오시는 남자 어른들께 차려 내던 간단한 밥상을 세뱃상이라고 했다. 대부분 식사 때를 피해서 오시는 분들이라 차리지 말라고 하시는 데도 우리할머니와 엄마는 꼭 차리셨다. 식사 때가 아니라서인지 새뱃상의 떡국그릇은 유난히 작았던 기억이 난다.  작은 소반에 떡국 한 그릇, 녹두지짐이 한 접시, 나박김치, 인절미 몇 개 놓은 접시에 다식 약과 한 두 개 그게 전부였던 것 같다.  물린상에 남은 떡 접시는 늘 우리들 차지였다.  그릇이 비어서 나오면 엄마는 표정이 흐믓하셨고 우리는 섭섭했었다.

금년 2월에 작년부터 다니고 있는 발효학교에서 김치에 관한 책을 내기 위한 작업의 일환으로 각자의 프로필 사진을 찍는데 주제가 자신들의 추억을 떠올리는 밥상 차리기였다. 

시기적으로도 음력정월이라 나는 엄마가 차려내시던 새뱃상을 차려보려고 했다

한복에 광목행주치마를 두르시고 짧은 시간에 후다닥 차려 내셨던 엄마의 새뱃상을 차리려고 하니 밥상의 상차림은 떠오르지 않고 상을 드신 엄마의 모습만 머릿속에 가득했다.  그리고 본적 없는 엄마의 새색시 적 모습이 함께 그려졌다.  기억 속에 엄마가 새뱃상을 차리던 모습은 초등학교 고학년이나 중학시절이니까 엄마나이가 40대였을 때인데 나는 한복에 행주치마를 두른 엄마의 모습을 떠올릴 때면 항상 상상 속의 새색시 적 엄마가 떠오른다.  어느 해인가 우리 집 네 자매가 큰 당숙께 새배를 드리러 갔는데 한복 입은 모습이 예쁘다고 딸들이 모두 엄마를 닮았다고 당숙모를 비롯 친척들이 칭찬을 해주시는데 그때 듣고 계시던 당숙부의 말씀은 나 뿐 아니라 우리 자매들 기억에 강하게 남아 있어 가끔씩 회자된다. "예쁘긴, 그년들 넷 인물 다 합쳐도 저희 엄마 인물 하나만 못해" 라고 한 말씀이다.  어렸을 적  몇 번인가 당숙모께 들은 얘기가 있다.  엄마가 갓 시집 오신 새색시 때 빨간 치마에 초록저고리를 입고 행주치마를 두르고 일하는 모습을 보고 혹시 여우가 사람으로 둔갑을 하고 우리 집안을 해하려고 온 게 아닐까 생각이 들 정도로 우리 엄마가 예쁘셨다고 했다.  밥상을 차리려고 옛날의 기억을 떠올리려는데 보지도 못한 엄마의 새색시 적 모습이  떠오른다.

작은 딸아이 시집 보낼 때 혼수로 보낸다고 사 두었던 소반 공예의 대가로부터 구입하여 깊숙이 넣어 두었던 해주소반을 꺼냈다. 양지머리를 고아낸 국물에 떡국을 끊이고 고명을 오방 색을 맞춰 올렸다.  무우나물과 고사리나물 한 접시, 배추 김치 한 보시기, 파김치와 도라지김치 한 접시, 동태 전 한 접시 그리고 떡국 그릇 옆에 내가 담근 7년 묵은 진간장 한 종지 조촐하지만 깔끔하고 맛깔스러워 보이는 밥상이었다.

한복에 흰색 행주치마를 두르고 밥상을 들고 있는 사진을 보며 실없이 웃음이 나왔다. 새색시 적 엄마의 모습을 떠올리면 준비한 새뱃상을 60대 중반의 내가 들고 웃는 모습에 그냥 자꾸 웃음이 났다.

'수필쓰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엄마가 만든 내 잠옷  (0) 2024.11.28
첫눈 내리는 날  (0) 2024.11.28
엄마에게 받는 용돈  (0) 2024.02.29
엄마가 만들어 주신 잠옷  (0) 2024.02.21
불륜(?) 부부  (0) 2024.01.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