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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이야기

2006년 8월 가족 이야기(아버지의 눈물)

by 단계와 넓은여울 2012. 7. 19.

아버님의 의무감.    http://blog.joinsmsn.com/psb1026/6651972

어제 밤엔 어머니가 내일 퇴원하신다니 아버님이 거의 흥분 상태였던 같다.
함께 퇴원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 당신이 간명을 있고, 해야 한다는 의무감에서 나온 나름대로의 결론인 것이다.
어머니의 상태가 호전된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집으로 돌아 간다니
어머니도 기분은 좋아 보인다.
병원에서 이상 있는 조치가 없다고 하니 퇴원밖에 방도가 없다.
수술을 없는 상태이니 10여년전부터도 종합병원에서 임원조차 받아 주질 않았다.

지켜지지 않겠지만 어머니와 새끼손가락 걸고 약속을 했다.
식사를 비롯한 집안일에 이상 관여하지 않기로..
약속을 지키면 퇴원을 안시키겠다고 협박(?) 했다.
만약에 하시면 저녁식사는 밖에서 먹고 들어 온다고 했다.
그동안 맛있는 것처럼 먹었지만, 주셔도 맛이 없다고도 했다.
집안일 도와 주시는 것이 나를 위하는 것이 아니라고도 했다.
아무말씀도 없으셨다.
자식으로써는 없는 어머니께는 정말 치명적인 말이지만 어쩔 없다.

오늘 아침 아버님은 면도까지 하고 계셨다.
주치의에게 물어 보지도 않고 어머니와 함꼐 퇴원하시겠다는 강력한 의지의 표현이다.
의사에게 숨도 안차고 잠도 잘자고 가래도 없고 몸무게도 2킬로 빠졌고
상태가 아주 좋다고 웃음까지 띄며 아부를 하신다.
주치의에게 아버님 원하시는대로 주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오늘 저녁엔 두분다 집에서 뵈었으면 좋겠다.

 

신혼생활 다시 시작    http://blog.joinsmsn.com/psb1026/6747584

 방학이 끝나감에 따라 큰딸도 오전에 비행기를 탓다.
다시 다음 방학때까지 우리집엔 부모님과 우리부부만 살게 된다.
오늘따라 어머니보다는 아버님이 아파트밑에까지 내려와
손녀손을 잡고 눈물을 글썽이신다.
방학동안내내 편찮으신 모습만 보여주신 것이 안타깝고
내년를 기약할 없다는 생각도 드신걸까?
예년과 달리 용돈 모아 놓으신걸 두손녀에게 나눠주신것도 예사롭지 않다.

애들과 오손도손 살아야 제맛이거늘
어쩌다 이렇게 살게 된것인지, 잘하고 있는 짓인지,
부모 정이나 제대로 알고 있을런지 도통 수가 없다.

아뭏튼 애들이 건강하고 아름답고 올바르게 스스로 사는 법을 배웠으면 좋겠다.
이번 주말엔 애들방에 대한 대청소를 해야겠다.
PC
둘째방으로 옮기고 서재로 쓰면서 공부도 해야지.
이왕이면 내방도 실혼방 비스무리하게 꾸며봐야지.
그리고 오랜만에 사랑 한번 볼까나

 

 

추접스런 모습 보이기 싫어서...    http://blog.joinsmsn.com/psb1026/6747617

얼마전부터 아버님이 휴일날 식사할때면
어머니하고 두분만 먼저 식사를 하시겠다고 해서 방학때 손녀들이 들어왔기 때문에
함께 식사하면 식탁이 복잡해서 그러신줄 알았다.

며칠전 이유를 알고나서 할 말을 잃어 버렸다.
나이들어 갈수록 식사할 밥풀 흘리고, 흘리고 반찬 떨어뜨리고,
콧물 흘리고, 재채기하고, 눈물 훔치고
애들한테저분하고 추접스런 모습 보이기 싫다는 말씀이시다.

나이들면 그런걸 신경 쓰시느냐고, 아무렇지도 않다고,
별걸 신경 쓰신다고 짐짓 웃으면서 위로를 했다.
네가 그렇게 생각해 준다면 고마운 말이나
아무리 부모라 한들 너희들도 좋을리 없지 않느냐는 말씀이시다.

관자놀이가 따끔거리고 머리가 띵해지고 코잔등이 시큰거리고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해 눈물이 돌아 버렸다.
자식도 크면 필요없다는 옛말이 맞는 모양이다.
50
이상을 함께 살았어도 늙으신 부모님 마음을 이다지도 헤아리지 못하다니
한심한 아들놈이란 생각이 든다.

가슴이 답답해 진다.
뉴스는 온통 바다이야기다.

 

 
아버지의 눈물.    http://blog.joinsmsn.com/psb1026/6767020

아버님의 육촌동생이 돌아 가셨다. 향년 여든하나이시다.
나도 어렸을때는 자주 만나 뵈옵던 분이고
최근까지 매년 두세차례는 우리집을 방문하곤 하셨다.
서울에 사시는 아버님 친척중 유일하신 분이다
어머니는 가실 엄두조차 낼 수가 없는 형편이고, 아버님 혼자는 가실 수가 없어 
퇴근한 후  9 넘어서 아버님만 모시고 강북삼성병원 상가에 갔다.

아버님은 일제시대 중학교때 일본으로 밀항하여 오사카에서 7년을 사시면서
목수일을 배우셨고 결국 직업이 되어 지금의 우리를 키워 오셨다.
돌아가신 삼촌께서 아버님밑에서 일을 배우고 그로 인해 생계를 유지하셨으니
아버님과는 형제이상으로 끈끈한 연을 가지신 분이셨다.
어려운 생활고를 극복하고자 60년에 아버님 혼자 서울로 올라오셨고
형은 61년, 어머니와 나, 누이들은 62년에 서울행 기차를 탔다. 국민학교 3학년때다.

돌아가신 삼촌도 그때 서울로 불러 올리셨다.
어린 기억으로도 삼촌이  아버지께 많이도 혼이 나셨던 기억이 난다.
자식들도 견디기 어려운 불같은 성격을 어떻게 버틸 있었겠는가?
많은 아저씨들이 아버지곁을 떠났던걸 기억한다.
대로 배우지도 못하고 그만두면 기술로 지가 어떻게 먹고 있겠는가고
서운해 하셨지만 주먹이 가까우니 도망갈 수밖에

삼촌은 결국 독립을 하였지만 아버지 말씀마따나 배운일 오래 하지 못하였다.
우리집과 마찬가지로 생활이 퍽이나 어려웠었다.
다행히 옛날 국제극장내(광화문 동아일보 건너편) 조그만 구멍가게를 얻게 되어
자식들 키우고 지금까지 생계를 유지하셨다.

아버지가 그렇게 눈물을 많이 흘리시는 할머니 돌아가시고 40여년만에 처음 같다.
일제시대부터 여순사건, 육이오, 객지생활 등 그 어려운 시절을 함께 동고동락하면서
수제자인 동시에 친척 동생으로, 친구로 함께 수십년을 생활을 하셨던 분이시니
감회가 오죽하겠는가.
말씀도 없이 한시간여를 눈물만 흘리시다 조용히 일어나시더니 집에 돌아가자고 하신다.
내가 딱히 여쭈어 말도 없어 집에 오는 동안까지 한마디도 없이 운전만 했다.
자정 다되어 집에 돌아 왔는데 갑자기 샤워를 하시고선 먼저 자라고 하셨다.

새벽에 갈증으로 나왔더니 TV 켜진채로 거실 소파에서 잠이 들어 계셨다.
팔십육년의 세월이 고스란히 묻어나는 얼굴이시다.
무슨 생각을 하시다 잠이 드셨을까?  네시가 조금 넘은 시각이다.
기력이 급격하게 떨어질까 걱정이다.